집 안에서 단순(單純)한 기술(技術)과 도구로써 작은 규모(規模)로 생산하는 수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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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음. 원래 조선 시대 대기근이나 전쟁(戰爭) 등 어려운 상황(狀況)일 때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切迫)함에서 유래된 말.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 – 공자가어
양약고구_정자흘림체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겨우 살아남.
중국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의 명신 굴원은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다른 이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멱라수에 돌덩이를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담아 낸 이소(離騷)라는 명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雖九死 猶未其悔).’ 후에 중국의 명문장들을 모은 문헌인 문선에 이소를 수록하면서, 문선을 편집한 유량주는 이소의 저 구절에 주를 달기를 “아홉 번 죽어서 한 번을 살아남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이후로 구사일생이라는 말이 회자(膾炙)되었다고 한다.
백번 활을 쏘아 백번 모두 맞히다. 목표로 삼은 것이 딱 들어맞았을 거나, 계획했던 일들이 예상대로 모두 순조롭게 성사됨을 비유.
춘추시대 초나라 공왕이 진나라 장수인 위기의 화살에 맞아 눈을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화가 난 공왕은 신궁(神弓)으로 이름 난 양유기에게 화살 두 개를 주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자, 양유기는 화살 한 대를 날려 위기를 죽이고 다른 한 대는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초나라에는 또 명궁으로 이름 난 반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반당이 오십 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설치해 놓고 화살을 날려 과녁 가운데를 정확히 맞히며 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양유기는 반당에게, “오십 보 앞에서 화살을 날려 과녁을 맞히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적어도 백보는 먼 거리에서 쏘아 맞혀야 활솜씨가 제법이라고 할 수 있지.” 라며 비아냥거렸다. 이 말에 화가 난 반당은 백 보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드나무 잎 세 개에 점을 표시해 놓고 양유기에게 맞혀보라고 하였다. 양유기는 활을 연속해서 세 번 쏘아 잎을 차례로 떨구었는데, 화살은 모두 버드나무 잎 한가운데를 꿰뚫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