芝蘭(지란)은 영지와 난초로 모두가 향초를 말한다. 즉,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향기로운 지란과 같은 벗 사이의 맑고도 깨끗한 사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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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것을 쌓는 것이 빨리 이루는 방법이다’는 뜻으로 작은 일이라도 매일 실천함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은 일은 자주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날이 많아 쌓이는 성과가 크다. 큰 일은 드물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날이 적어 쌓이는 성과가 작다. (小事之至也數 其縣日也博 其爲積也大. 大事之至也希 其縣日也淺 其爲積也小) 그러므로 공적과 명성은 작은 일들을 잘 이루어 가는 사람이 더욱 빨리 성취한다. (積微者速成)
순자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일이란 부담없이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바쁜 일과 중 짧은 짬으로 할 수 있을만큼 작은 일이다. 큰 일은 한 번 하기에 버거운 일이다. 준비가 필요하고 따로 시간도 내어야 한다.
쉽게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꾸준히 실천하면 그 성과는 놀라울 것이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내는 놀라움이다. (水滴穿石)
작은 일을 실천 하지도 않으면서 시시하게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미련함은 피하라. 시시해 보이는 일도 쌓아가다 보면 반드시 가속력이 붙는다. 처음 작은 걸음도 힘이 붙기 시작하면 성큼성큼 갈 수 있다. 요령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점점 붙어 가는 까닭이다.
그러니 쓸데 없는 공상이나 걱정은 접어두시고 시시하게 생각했던 그 일을 당장 시작하자. ㅋ
눈은 높은 곳(眼高)에 있고 손은 아래쪽(手卑)에 있다는 뜻으로 보는 수준과 뜻은 크고 높으나 그 재주가 아직 따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원래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잘하지만 실제 그의 능력은 따라가지 못함을 비꼬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남의 비평 따위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안고수비니 어쩌니 말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안고수비를 떠들어 대는 사람은 본인의 실력 역시 졸렬拙劣한 경우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 본인의 실력이 그리 좋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 여긴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본인을 평가하면 대번에 화가난다. 또는 본인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 생각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데 본인보다 실력이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 작품 저 작품 내어 놓는 일이 마뜩잖을때 쓰는 말이 아닐런가.
보는 눈이 높다면 기술은 따라올 수 있다. 기술은 얼마나 수련하는가 즉 시간, 노력과의 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눈은 당연히 실력에 앞서 좋아야 한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실력도 높일 수 있다. 용과 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용을 그릴텐가? 호랑이와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호랑이를 연습할텐가?
음식맛을 잘 아는 사람이 요리 실력도 빨리 는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음식도 맛이 없는 줄 아니깐. 음식 맛을 모르는데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까?
사실 보는 눈만 좋아도 무방하다. 영화평론가가 영화감독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맛칼럼니스트가 일류셰프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배움이 중요하다. 좋은 글이든 작품이든 또는 훌륭한 글씨, 수준 높은 그림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우선 가져야 한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초보자들이여~ 본인이 배워가고 있고 노력 중이라면 쓸데 없는 걱정은 말고 작품을 내놓아라. 그대에게 안고수비니 뭐니 떠들어 대는 사람도 뭐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닐테니까.
모기를 보고 칼을 뽑다는 뜻으로 조그만 일에도 성을 내는 소견좁은 행동이나 하찮은 일에 거창하게 덤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논어 양화편의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어찌 소 칼을 쓰리오)”와도 비슷한 말이다.
또 비슷한 성어로 교각살우(矯角殺牛)도 있다. 쇠뿔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작은 일에 거창하게 덤비다가는 오히려 크게 일을 망치는 것은 경계하는 구절이 많다.
물론 모기를 잡으려면 양 손바닥이나 살충제면 충분하다. 모기를 잡으려 칼을 뺐다가는 본인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모기를 보고 칼을 뽑을까? 모기로 판단을 잘못한 까닭에 칼을 뽑는 것이 아닐까? 진짜 모기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두에게 모기 같은 일이라는 것은 없다.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뿔 대회’가 있어 그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소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야 왜 멀쩡한 소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느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야 소뿔을 고쳐놓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엉뚱한 일로 씩씩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생기는 일들이 ‘작은 일인지, 큰 일인지?’ ‘하찮은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판단할 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본인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는지, 본인 삶의 방향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모기를 보고 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는다는 뜻으로 작은 것에 연연하다 오히려 큰 것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중국 춘추 전국 시대 강대국인 진나라의 혜왕은 촉나라를 정복하려 했다.
촉나라는 전략적으로도 꼭 필요한 지역인데다가, 많은 보화를 지닌 나라였으므로 촉을 정복하면 국익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촉나라로 가는 지형이 매우 험난하여 침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나라 혜왕은 촉왕이 욕심이 많은 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혜왕은 우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소를 만들게 하고는 그 속에 황금과 비단을 채워넣고 황금 똥을 누는 소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촉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소를 보낼 길이 만들어진다면 황금똥을 누는 소를 우호의 예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촉나라의 신하는 함정일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촉왕은 보화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동원하여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 소가 지날 큰길을 만들었다. 길이 뚫리자 진나라 왕은 곧바로 촉나라를 공격하여 쉽게 정복하였다. 결국 촉왕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지금 당장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욕심내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 때문에 뒤로 밀쳐 진 일들은 과연 작은 일인가?
부가 중요한가? 건강이중요한가?
일이 중요한가? 가족이 중요한가?
재산이 중요한가? 형제가 중요한가?
무엇이 ‘소’이고 무엇이 ‘대’일까? 잘 판단하지 않으면 촉나라의 왕처럼 작은것을 얻고 큰 것을 놓칠지도 모를 일이다.
수서양단이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라는 뜻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을 살피며 눈치 보는 것을 비유하여 나타낸 말이다.
물론 구멍에서 머리만 내민 쥐처럼 상황을 파악하고 조심을 하며 결정을 보류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될지언정 반드시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결정 없이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다. 때론 그것이 실패보다 더 나쁜 결과일 수 있다. 뼈 아프고 고통스런 실패지만, 실패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며 성공으로 가는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보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행하고 도전할 것인가?
적절한 때를 놓친다면 실수를 수습하고 만회挽回할 시간도, 다시 도전하여 성공할 시간도 줄어든다. 최악은 완전히 때를 놓치고 후회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어려움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한다. 백절불요와 비슷한 말로는 ‘백절불굴百折不屈’, ‘불요불굴不撓不屈’이 있다.
중국 역사서 ‘후한서’에 실린 교현이라는 관리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교현은 겸손하고 검소 하였으며, 청렴하여 자제나 친척들 중에서 큰 관직을 얻은 자가 없었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에 빈소를 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또한 부하는 물론 권력자의 부정도 눈감아 주지 않을 정도로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다. 그러한 교현이 병치료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자신의 열살난 막내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집안 누각으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 관병들이 곧 강도들을 포위했으나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 두려워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현은 “어찌 내 아들의 목숨 때문에 간악한 무리들을 그냥 둘수 있겠는가?” 하며 관병들을 다그쳐 강도는 잡았으나 아들은 구하지 못했다.
훗날 문인이자 서예가인 채옹이라는 사람이 그를 기려 묘비명을 지었다.
“백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대의에 임해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모를 지녔네(有百折不撓 臨大節而不可奪之風).”
과하지욕은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이라는 뜻으로 큰 뜻을 위해서 사소한 굴욕은 참고 견뎌내다는 의미이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이 있는 세 명의 공신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서한삼걸西漢三杰’이라 불리는 소하, 장량, 한신이다. 그 가운데 왕가의 자손 출신인 한신의 이야기이다.
한신이 젊은 날 고향 회음에서 큰 칼을 차고 저잣거리를 가고 있는데 불량배들이 앞을 가로막고 “네가 용기가 있다면 차고 있는 그 큰 칼로 나를 찔러 봐라! 그렇지 않으면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라” 고 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한신은 분을 참지 못해 살인자가 되어 도망 다니기 보다는 잠깐의 치욕을 택했다. 이 때 나온 고사성어가 ‘과하지욕袴下之辱’이다. 이 고사성어는 사소한 시비는 참고 넘어갈 수 정도로 한신이 큰 뜻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한신처럼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큰 치욕은 몰라도 종종 작은 모욕을 받거나 자존심에 상처 입을 때가 있다. 받은대로 되돌려주고 자존심을 회복할 것인가? 참고 견딜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든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상록수로 사시사철 항상 푸르면서도 서로 비슷하게 생겨 흔히 가까운 벗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송무백열이라고 하면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벗이 잘 되어 기뻐할 때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송무백열과 비슷한 뜻의 사자성어로는 혜분난비(蕙焚蘭悲)가 있는데, ‘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는 뜻으로 벗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風餐露宿은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의 숙야인가시(宿野人家詩)의 “늙으니 내세로 가는 길도 흐릿하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하구나,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고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으니 허물인지 알지도 못 하겠구나(老來世路渾諳盡,露宿風餐未覺非)”에서 유래하였다.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서 밥을 먹고 지붕도 없는 노천에서 이슬을 맞으며 잔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편으로 큰 뜻을 세우려는 사람이 온갖 만행의 고초를 겪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