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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명구"의 글 태그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키려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명성이나 권력, 또는 금(金)과 같은 이욕(利慾)만을 좇다보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어딘가 부정적 어감을 준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 이슬 먹고 구름 타려는 사는 사람 아니고서야 명성이나 권력, 이익은 누구나 조금씩은 바라는 바가 아닌가? 솔직히 본인도 사슴과 금, 몹시 원한다. ㅋ

성인이라 추앙받는 공자역시 부(富)와 귀(貴)를 싫어하지 않았다.

“부(富)를 얻을 수 있으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나 또한 그것을 하겠다.(富而可求也인댄 雖執鞭之士라도 吾亦爲之라)” – 논어.술이.11장

공자님도 말채찍을 잡아서라도 바란다 하셨으니, 아마 나를 꼭 속물이라 평할수는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어감은 ‘사슴과 금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하는 문제 때문에 생긴다.

공자님은 같은 술이편에서 이야기한다.
“의(義)롭지 못하고서 부(富)하고 또 귀(貴)함은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는 於我如浮雲이니라)” – 논어.술이.15장

그렇다. 부귀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의(義)로움을 잃기 쉬운 법.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라는 성경 말씀도 있지 않은가?

이욕(利慾)에 눈이 멀어 사슴과 금만을 좇다보면 산과 사람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산이 보이지 않으니 인륜과 도덕을 잃고 나아갈 길마저 잃어 돌아올 곳이 없게 된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부끄러움을 모르고 양심을 잃어 그 모습이 못내 추해진다.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저마다의 목표는 다르다. 사슴이 될 수도 있고, 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를 목표로 삼아 행복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면 목적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돌아보며 살자.
지금 당신은 어디에 누구와 함께하고 있나.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목표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큰일 아닌가.

뜨끔한 마음에 지금 나도 멈추어 서 본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분야의 달인(達人)이라면 도구나 조건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글씨를 잘 쓰기로 구양순이 유명했는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또 다른 서예의 달인으로 우세남·저수량·유공권이 있었는데,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자신의 글씨가 구양순에 비하여 어떠하냐고 묻자, “구양순은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자네는 아무래도 안될꺼야.”라고 했다.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능서불택필이라니 언감생심焉敢生心, 나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또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한들, 다른 사람이 평가할 일이지 본인이 그렇다 하면 그 얼마나 오만하게 들릴 말인가?

그러니 대신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을 마음에 새길 구절로 삼는다. 이 문장은 ‘못에 임하여 글씨를 배움에 연못의 물이 모두 검어졌다’는 뜻으로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고사는 중국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의 이야기이다. 장지는 서예를 배움에 자만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고, 매우 부지런히 노력하고 꾸준히 익혔다고 전하는데, 그는 오로지 서도(書道)를 벗 삼았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글씨를 썼다고 한다.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썼다. 그리고 못에 붓을 헹구었는데 그 못이 전부 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이라는 구절이 유래하였다.

못물이 검어지도록 붓을 헹구던 장지의 노력 역시 흉내내기 힘들겠지만,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 한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다면 또한 나름의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모기를 보고 칼을 뽑다는 뜻으로 조그만 일에도 성을 내는 소견좁은 행동이나 하찮은 일에 거창하게 덤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논어 양화편의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어찌 소 칼을 쓰리오)”와도 비슷한 말이다.

또 비슷한 성어로 교각살우(矯角殺牛)도 있다. 쇠뿔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작은 일에 거창하게 덤비다가는 오히려 크게 일을 망치는 것은 경계하는 구절이 많다.

물론 모기를 잡으려면 양 손바닥이나 살충제면 충분하다. 모기를 잡으려 칼을 뺐다가는 본인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모기를 보고 칼을 뽑을까? 모기로 판단을 잘못한 까닭에 칼을 뽑는 것이 아닐까? 진짜 모기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두에게 모기 같은 일이라는 것은 없다.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뿔 대회’가 있어 그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소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야 왜 멀쩡한 소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느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야 소뿔을 고쳐놓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엉뚱한 일로 씩씩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생기는 일들이 ‘작은 일인지, 큰 일인지?’ ‘하찮은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판단할 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본인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는지, 본인 삶의 방향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모기를 보고 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지금 만나는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동성상응 동기상구(同聲相應 同氣相求)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된다.’는 뜻으로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진동수를 갖는 두 개의 소리굽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하나를 울리면 다른 쪽 소리굽쇠도 함께 진동하며 소리가 난다. 공명현상이다. 그러나 두 소리굽쇠의 진동수가 서로 다르면 상대편의 소리굽쇠는 울리지 않는다. 이렇듯 동성상응 동기상구는 뜻이 같거나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과 뜻이 통한다.

율곡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동성상응 동기상구’ 문구를 인용하면서 “만약 내가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면, 반드시 학문하는 사람을 찾을 것이고 학문하는 사람도 또한 반드시 나를 찾을 것(若我志於學問, 則我必求學問之士. 學問之士 亦必求我矣.)”이라고 하였다.

지금 당신과 어울리는 친구들은 어떤가? 무엇을 좋아하는 친구인가? 그 친구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떠한가? 그 친구의 모습이 당신의 현재 모습이거나 미래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창름실이지예절倉廩實而知禮節, 의식족이지영욕衣食足而知榮辱”
창고가 튼실해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해야 영화로움과 욕됨을 안다. – 관중

백성들로 하여금 염치를 차리고 예절을 알게 만들려면 먼저 배불리 먹이고 여유 있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마원은 후한(後漢) 시대의 명장이다. 그는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를 보좌해 각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가 후한에 귀순하기 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의 휘하에 잠시 머물렀으나 마원은 왕망이 천하를 얻을 그릇이 못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는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다. 마원은 광무제에게 “군주만 신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신하 역시 군주를 선택합니다(非君擇臣亦擇君)”라고 하였다.

酒逢知己千杯小, 話不投機半句多.
지기를 만나면 천 잔의 술도 적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말도 많다. – 구양수
 
지기知己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알아주는 친구이다. 그런 반가운 이를 만나면 천 잔의 술도 적지만,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는 반 마디 말도 나누기 싫다는 뜻이다. 세상에 아는 사람은 많다. sns로 아는 친구는 수 십명을 훌쩍 넘는다. 명심보감 교우편의 한 문장이 생각난다.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친구가 수천이 넘어도 마음 속 허전함이 솟아오르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