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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주장이 없이 타인의 의견에 무조건 찬성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우레가 한번 울리면 하늘 아래 만물도 덩달아 울린다고 해서 ‘뇌동雷同’이라 했다. 자기 주관 없이 경솔하게 남의 의견에 따른다는 ‘부화附和’는 나중에 붙은 말이다.

눈은 높은 곳(眼高)에 있고 손은 아래쪽(手卑)에 있다는 뜻으로 보는 수준과 뜻은 크고 높으나 그 재주가 아직 따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원래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잘하지만 실제 그의 능력은 따라가지 못함을 비꼬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남의 비평 따위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안고수비니 어쩌니 말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안고수비를 떠들어 대는 사람은 본인의 실력 역시 졸렬拙劣한 경우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 본인의 실력이 그리 좋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 여긴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본인을 평가하면 대번에 화가난다. 또는 본인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 생각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데 본인보다 실력이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 작품 저 작품 내어 놓는 일이 마뜩잖을때 쓰는 말이 아닐런가.

보는 눈이 높다면 기술은 따라올 수 있다. 기술은 얼마나 수련하는가 즉 시간, 노력과의 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눈은 당연히 실력에 앞서 좋아야 한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실력도 높일 수 있다. 용과 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용을 그릴텐가? 호랑이와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호랑이를 연습할텐가?
음식맛을 잘 아는 사람이 요리 실력도 빨리 는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음식도 맛이 없는 줄 아니깐. 음식 맛을 모르는데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까?

사실 보는 눈만 좋아도 무방하다. 영화평론가가 영화감독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맛칼럼니스트가 일류셰프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배움이 중요하다. 좋은 글이든 작품이든 또는 훌륭한 글씨, 수준 높은 그림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우선 가져야 한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초보자들이여~ 본인이 배워가고 있고 노력 중이라면 쓸데 없는 걱정은 말고 작품을 내놓아라. 그대에게 안고수비니 뭐니 떠들어 대는 사람도 뭐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닐테니까.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분야의 달인(達人)이라면 도구나 조건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글씨를 잘 쓰기로 구양순이 유명했는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또 다른 서예의 달인으로 우세남·저수량·유공권이 있었는데,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자신의 글씨가 구양순에 비하여 어떠하냐고 묻자, “구양순은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자네는 아무래도 안될꺼야.”라고 했다.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능서불택필이라니 언감생심焉敢生心, 나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또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한들, 다른 사람이 평가할 일이지 본인이 그렇다 하면 그 얼마나 오만하게 들릴 말인가?

그러니 대신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을 마음에 새길 구절로 삼는다. 이 문장은 ‘못에 임하여 글씨를 배움에 연못의 물이 모두 검어졌다’는 뜻으로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고사는 중국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의 이야기이다. 장지는 서예를 배움에 자만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고, 매우 부지런히 노력하고 꾸준히 익혔다고 전하는데, 그는 오로지 서도(書道)를 벗 삼았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글씨를 썼다고 한다.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썼다. 그리고 못에 붓을 헹구었는데 그 못이 전부 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이라는 구절이 유래하였다.

못물이 검어지도록 붓을 헹구던 장지의 노력 역시 흉내내기 힘들겠지만,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 한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다면 또한 나름의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모기를 보고 칼을 뽑다는 뜻으로 조그만 일에도 성을 내는 소견좁은 행동이나 하찮은 일에 거창하게 덤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논어 양화편의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어찌 소 칼을 쓰리오)”와도 비슷한 말이다.

또 비슷한 성어로 교각살우(矯角殺牛)도 있다. 쇠뿔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작은 일에 거창하게 덤비다가는 오히려 크게 일을 망치는 것은 경계하는 구절이 많다.

물론 모기를 잡으려면 양 손바닥이나 살충제면 충분하다. 모기를 잡으려 칼을 뺐다가는 본인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모기를 보고 칼을 뽑을까? 모기로 판단을 잘못한 까닭에 칼을 뽑는 것이 아닐까? 진짜 모기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두에게 모기 같은 일이라는 것은 없다.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뿔 대회’가 있어 그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소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야 왜 멀쩡한 소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느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야 소뿔을 고쳐놓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엉뚱한 일로 씩씩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생기는 일들이 ‘작은 일인지, 큰 일인지?’ ‘하찮은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판단할 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본인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는지, 본인 삶의 방향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모기를 보고 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 주장에 맞도록 하다.’라는 뜻으로 전혀 다른 이론을 자신의 주장에 근거로 쓰기 위해 강제로 부합시켜 옳다고 우길 때 쓰는 말이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논리를 견강부회라 치부할 지도 모른다.
2. 상황이 악화되는 이유를 정치적 의도와 결부시키려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이다.

비슷한 한자성어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다. 아전인수란 다른 사람이야 농사를 망치든 말든 ‘내 밭에 물을 끌어온다’는 뜻으로, 남들의 상황이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를 말한다.

1. 그 사람의 행동은 아전인수 격이다.

 ‘격’이 일부 명사 뒤에 쓰여서 자격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의존 명사로서 앞말과 띄어쓴다.

국립국어원 ‘우리말 바로 쓰기’는 ‘아전인수(我田引水)’와 견강부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하 전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이라는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주로 ‘말’과 관련되고,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인 ‘아전인수(我田引水)’는 ‘말’뿐만 아니라 ‘생각’, ‘행동’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 둘이 어떤 문맥에서나 통용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는다는 뜻으로 작은 것에 연연하다 오히려 큰 것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중국 춘추 전국 시대 강대국인 진나라의 혜왕은 촉나라를 정복하려 했다.
촉나라는 전략적으로도 꼭 필요한 지역인데다가, 많은 보화를 지닌 나라였으므로 촉을 정복하면 국익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촉나라로 가는 지형이 매우 험난하여 침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나라 혜왕은 촉왕이 욕심이 많은 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혜왕은 우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소를 만들게 하고는 그 속에 황금과 비단을 채워넣고 황금 똥을 누는 소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촉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소를 보낼 길이 만들어진다면 황금똥을 누는 소를 우호의 예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촉나라의 신하는 함정일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촉왕은 보화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동원하여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 소가 지날 큰길을 만들었다. 길이 뚫리자 진나라 왕은 곧바로 촉나라를 공격하여 쉽게 정복하였다. 결국 촉왕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지금 당장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욕심내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 때문에 뒤로 밀쳐 진 일들은 과연 작은 일인가?

부가 중요한가? 건강이중요한가?
일이 중요한가? 가족이 중요한가?
재산이 중요한가? 형제가 중요한가?

무엇이 ‘소’이고 무엇이 ‘대’일까? 잘 판단하지 않으면 촉나라의 왕처럼 작은것을 얻고 큰 것을 놓칠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하찮은 공을 자랑하거나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것을 자랑 삼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말이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초기 어양태수 팽종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광무제가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하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3000 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가세 했으며, 후에 군량 보급의 중책을 맡아 잘 처리함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그러나 팽총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꾀했다. 그러자 대장군 주부가 그를 꾸짖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 요동 사람이 자기가 기르던 돼지가 머리가 흰 새끼를 낳자 이를 귀한것으로 여겨 왕에 바치려고 하동까지 갔다. 그런데 그곳의 돼지는 모두 머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고 한다. 만일 그대의 공을 지금 조정에서 논한다면 아마도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그러나 팽총은 주부의 이러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연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모반을 꾀하여 2년 후 토벌되고 말았다.

수서양단이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라는 뜻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을 살피며 눈치 보는 것을 비유하여 나타낸 말이다.

물론 구멍에서 머리만 내민 쥐처럼 상황을 파악하고 조심을 하며 결정을 보류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될지언정 반드시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결정 없이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다. 때론 그것이 실패보다 더 나쁜 결과일 수 있다. 뼈 아프고 고통스런 실패지만, 실패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며 성공으로 가는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보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행하고 도전할 것인가?
적절한 때를 놓친다면 실수를 수습하고 만회挽回할 시간도, 다시 도전하여 성공할 시간도 줄어든다. 최악은 완전히 때를 놓치고 후회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어려움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한다. 백절불요와 비슷한 말로는 ‘백절불굴百折不屈’, ‘불요불굴不撓不屈’이 있다.
중국 역사서 ‘후한서’에 실린 교현이라는 관리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교현은 겸손하고 검소 하였으며, 청렴하여 자제나 친척들 중에서 큰 관직을 얻은 자가 없었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에 빈소를 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또한 부하는 물론 권력자의 부정도 눈감아 주지 않을 정도로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다. 그러한 교현이 병치료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자신의 열살난 막내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집안 누각으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 관병들이 곧 강도들을 포위했으나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 두려워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현은 “어찌 내 아들의 목숨 때문에 간악한 무리들을 그냥 둘수 있겠는가?” 하며 관병들을 다그쳐 강도는 잡았으나 아들은 구하지 못했다.

훗날 문인이자 서예가인 채옹이라는 사람이 그를 기려 묘비명을 지었다.
“백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대의에 임해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모를 지녔네(有百折不撓 臨大節而不可奪之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