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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의 글 태그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장군 반초의 이야기다. 반초가 중국 서쪽 나라 선선국에 사신으로 떠난 일이 있었다. 선선국왕은 처음에는 반초를 후하게 대접했으나, 후한과 적국인 흉노국(匈奴國)의 사신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후한의 반초 일행을 박대하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반초는 선선국의 왕이 그의 일행을 사로잡아 흉노에 넘길 것이라 생각하고, 일행에게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흉노국의 사신이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있다. 선선국왕은 우리를 죽이거나 흉노국의 사신에게 넘겨 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죽임을 당할 것이다. 차라리 기습을 하는 것이 낫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못 잡는다[不入虎穴不得虎子]’. 우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오늘 밤 기습을 한다면 분명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반초 일행은 흉노의 숙소에 불을 지르고 기습하여 흉노의 사신과 병사 모두를 죽였다.
이 일을 계기고 선선국이 굴복했음은 물론 인근 50여 오랑캐의 나라들도 한나라를 상국 (上國)으로 섬기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때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 원하는 것이 얻기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위험은 더욱 커진다.

현재의 이점과 이득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또 다른 것을 구하려 한다. 호랑이 새끼를 얻으려고 하면서 안전까지 보장받으려 하다니 도둑놈 심보다.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남들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들이 열 번 만에 잘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이 방법에 능숙해지면 어리석은 자는 현명해지고 유약한 자는 강해질 것이다. – 중용

노익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기력이 더욱 좋아지거나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마원은 후한시대의 명장으로 각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명성을 얻은 것은 쉰이 넘어서였는데, 나이가 많다고 물러서는 법이 없었으며 오히려 어려운 일에 자원하여 활약했다.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이
“무릇 대장부는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바로 노익장이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의 뜻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서 어떤 결과를 얻어 내기에는 늦었다.’의 의미와 통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기쁨과 배워가는 과정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에게 늦은 나이란 없다.

노익장.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분명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 떳떳하다.’라는 뜻이다. 공자는 이것을 큰 용기大勇라 하였는데,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맹자 공손추장구상편에 보인다.
스스로 돌아보아 떳떳하지 못하면 비록 보잘 것 없는 천인(賤人)이라도 나는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고, 스스로 돌아보아 떳떳하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 앞에서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떳떳한가 아닌가는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비추어 판단한다. 타인에게 지탄 받지 않을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면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음속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면 내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선 돌아볼 일이다.

퇴고란 한자의 뜻은 ‘밀다, 두드리다.’라는 뜻이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고심하여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에 가도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새는 연못가에서 자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라는 시구를 얻었다. 그런데 ‘두드리다’를 뜻하는 ‘고(敲)’자 대신 ‘밀다’를 뜻하는 ‘추(推)’자를 쓰면 어떨까 고민이 되었다. 이 때 마침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한유를 우연히 만나 그의 조언으로 ‘고(敲)’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시구 한 자를 결정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작품 태도에서 ‘퇴고 (推敲)’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소소한 것을 쌓는 것이 빨리 이루는 방법이다’는 뜻으로 작은 일이라도 매일 실천함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은 일은 자주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날이 많아 쌓이는 성과가 크다. 큰 일은 드물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날이 적어 쌓이는 성과가 작다. (小事之至也數 其縣日也博 其爲積也大. 大事之至也希 其縣日也淺 其爲積也小) 그러므로 공적과 명성은 작은 일들을 잘 이루어 가는 사람이 더욱 빨리 성취한다. (積微者速成)

순자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일이란 부담없이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바쁜 일과 중 짧은 짬으로 할 수 있을만큼 작은 일이다. 큰 일은 한 번 하기에 버거운 일이다. 준비가 필요하고 따로 시간도 내어야 한다.

쉽게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꾸준히 실천하면 그 성과는 놀라울 것이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내는 놀라움이다. (水滴穿石)

작은 일을 실천 하지도 않으면서 시시하게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미련함은 피하라. 시시해 보이는 일도 쌓아가다 보면 반드시 가속력이 붙는다. 처음 작은 걸음도 힘이 붙기 시작하면 성큼성큼 갈 수 있다. 요령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점점 붙어 가는 까닭이다.

그러니 쓸데 없는 공상이나 걱정은 접어두시고 시시하게 생각했던 그 일을 당장 시작하자. ㅋ

눈은 높은 곳(眼高)에 있고 손은 아래쪽(手卑)에 있다는 뜻으로 보는 수준과 뜻은 크고 높으나 그 재주가 아직 따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원래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잘하지만 실제 그의 능력은 따라가지 못함을 비꼬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남의 비평 따위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안고수비니 어쩌니 말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안고수비를 떠들어 대는 사람은 본인의 실력 역시 졸렬拙劣한 경우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 본인의 실력이 그리 좋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 여긴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본인을 평가하면 대번에 화가난다. 또는 본인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 생각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데 본인보다 실력이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 작품 저 작품 내어 놓는 일이 마뜩잖을때 쓰는 말이 아닐런가.

보는 눈이 높다면 기술은 따라올 수 있다. 기술은 얼마나 수련하는가 즉 시간, 노력과의 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눈은 당연히 실력에 앞서 좋아야 한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실력도 높일 수 있다. 용과 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용을 그릴텐가? 호랑이와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호랑이를 연습할텐가?
음식맛을 잘 아는 사람이 요리 실력도 빨리 는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음식도 맛이 없는 줄 아니깐. 음식 맛을 모르는데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까?

사실 보는 눈만 좋아도 무방하다. 영화평론가가 영화감독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맛칼럼니스트가 일류셰프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배움이 중요하다. 좋은 글이든 작품이든 또는 훌륭한 글씨, 수준 높은 그림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우선 가져야 한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초보자들이여~ 본인이 배워가고 있고 노력 중이라면 쓸데 없는 걱정은 말고 작품을 내놓아라. 그대에게 안고수비니 뭐니 떠들어 대는 사람도 뭐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닐테니까.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분야의 달인(達人)이라면 도구나 조건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글씨를 잘 쓰기로 구양순이 유명했는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또 다른 서예의 달인으로 우세남·저수량·유공권이 있었는데,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자신의 글씨가 구양순에 비하여 어떠하냐고 묻자, “구양순은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자네는 아무래도 안될꺼야.”라고 했다.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능서불택필이라니 언감생심焉敢生心, 나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또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한들, 다른 사람이 평가할 일이지 본인이 그렇다 하면 그 얼마나 오만하게 들릴 말인가?

그러니 대신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을 마음에 새길 구절로 삼는다. 이 문장은 ‘못에 임하여 글씨를 배움에 연못의 물이 모두 검어졌다’는 뜻으로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고사는 중국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의 이야기이다. 장지는 서예를 배움에 자만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고, 매우 부지런히 노력하고 꾸준히 익혔다고 전하는데, 그는 오로지 서도(書道)를 벗 삼았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글씨를 썼다고 한다.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썼다. 그리고 못에 붓을 헹구었는데 그 못이 전부 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임지학서 지수진묵(臨池學書 池水盡墨)이라는 구절이 유래하였다.

못물이 검어지도록 붓을 헹구던 장지의 노력 역시 흉내내기 힘들겠지만,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 한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다면 또한 나름의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모기를 보고 칼을 뽑다는 뜻으로 조그만 일에도 성을 내는 소견좁은 행동이나 하찮은 일에 거창하게 덤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논어 양화편의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어찌 소 칼을 쓰리오)”와도 비슷한 말이다.

또 비슷한 성어로 교각살우(矯角殺牛)도 있다. 쇠뿔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작은 일에 거창하게 덤비다가는 오히려 크게 일을 망치는 것은 경계하는 구절이 많다.

물론 모기를 잡으려면 양 손바닥이나 살충제면 충분하다. 모기를 잡으려 칼을 뺐다가는 본인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모기를 보고 칼을 뽑을까? 모기로 판단을 잘못한 까닭에 칼을 뽑는 것이 아닐까? 진짜 모기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두에게 모기 같은 일이라는 것은 없다.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뿔 대회’가 있어 그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소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야 왜 멀쩡한 소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느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야 소뿔을 고쳐놓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엉뚱한 일로 씩씩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생기는 일들이 ‘작은 일인지, 큰 일인지?’ ‘하찮은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판단할 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본인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는지, 본인 삶의 방향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모기를 보고 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