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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의 글 태그

어릴 때 같이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벗이란 뜻. 어렸을 때의 벗이나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의미함.

진(晉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황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은호(殷浩)라는 이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임명했다. 사실 은호는 환온과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지만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그 무렵 중원 땅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하여 중원 땅을 정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간 은호는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가난하고 천할 때의 벗은 잊어서는 안 된다.

옛날 越(월)지방에선 처음 친구를 사귈 때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는 수레를 타고 나는 삿갓을 썼어도 후에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인사하시오. 나는 걷고 그대는 말을 탔어도 후에 만나면 말에서 내리시오.”

‘수레 타고 삿갓 쓰다.’의 뜻인 乘車戴笠(승거대립)은 바로 우정이 두터워 빈부나 귀천에 의해 변하지 않음을 비유한다.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비유.

“주자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지혜가 없어서,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으로 세울 수 없었다.(周子有兄而無慧, 不能辨菽麥, 故不可立)”

– 춘추좌전

‘마음이나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업이나 어떤 일을 추진할 때’를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는 장비의 부탁으로 그의 후원 복숭아밭(도원桃園)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念劉備關羽張備 雖然異姓 旣結爲兄弟 則同心協力 求困扶危 上報國家 下安黎庶. 不求同年同月同日生 但願同年同月同日死. 皇天后土 實鑑此心 背義忘恩 天人共戮

생각건대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비록 성이 다르다 할지라도 이미 형제를 맺으려고 하니, 곧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힘을 합쳐, 곤란함을 구원하고 위태함을 도와,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편안하게 하리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남을 구하지 않더라도, 단지 원하는 것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으려 한다. 황천과 후토는 진실로 이 마음을 보시고, 의에 배반하고 은혜를 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일 것이다.

되돌려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다.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아 고침.

군자는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허물을 남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 맹자
위 맹자의 말에서 허물을 자신에게서 구한다는 ‘반구저기’가 나왔는데, 하(夏)나라 백계(伯啓)의 고사에서 기원한 말이라고 한다.

중국 하나라 우(禹)임금 때, 제후 중 한명인 유호씨(有扈氏)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우임금은 아들 백계를 보내 유호씨의 공격을 막게 했는데, 백계는 유호씨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참패의 원인은 많았지만, 백계는 참패의 원인으로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리며, “나는 유호씨에 비하여 영토도 작지 않고 백성들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나의 덕이 부족하고 지도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백계는 더욱 분발하여 검소하게 생활하며, 백성을 아끼고 덕이 있는 사람을 우대하며 재능 있는 사람을 널리 기용했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유호씨가 스스로 복속했다.

대롱의 구멍으로 하늘을 엿본다는 말로 좁은 식견으로는 광대한 사물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의미함.

춘추시대 말기 편작(扁鵲)이라는 뛰어난 명의가 있었다. 그가 괵이라는 작은 나라에 간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나라의 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작은 궁궐의 어의를 만나 태자의 병에 대해 듣고 태자를 살려보겠다고 하였다. 괵 나라의 어의는 깜짝 놀라며 편작을 비웃었다. 편작은 “당신의 의술은 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엿보며(用管窺天) 좁은 틈새로 상황을 살피는 것과 같이 도저히 전체를 간파한다고 할 수 없소. 나의 의술은 전체를 보는 것이요. 못 믿겠으면 다시 한 번 태자를 진단해 보시오. 양쪽 허벅다리를 쓰다듬어 가다가 음부에 닿으면 아직 그곳이 따뜻할 것이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다시 살펴보니 과연 편작의 말대로였다. 마침내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가 살아나 며칠 후 건강을 되찾았다. 이 일로 편작이 죽은 이도 살려낸다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자 편작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죽은 이를 소생시킨 것이 아니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고친 것뿐입니다.”

– 사기.편작창공열전

등불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말로, 책을 읽고 학문을 탐구하기에 좋다는 뜻.

한유(韓愈)가 아들의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지은 시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 중에 등장한다.

時秋積雨霽 철은 가을 되어 장마는 그치고
新凉入郊墟 서늘한 기운은 마을에 가득하네.
燈火秒可親 이제 등불을 가까이 할만 하니
簡編可卷舒 책 펼칠 만 하게 되었구나.

자하가 거보 땅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두르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 하지 마라. 서두르면 달성할 수 없고, 작은 이익을 보려 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늙은 재상(宰相)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임금에게 그만두기를 주청(奏請)함을 이르는 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쫓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고전하고 있을 때, 유방은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항우는 이에 응하려고 했으나 모사 범증이 반대하였다. 유방의 참모 진평은 이 소식을 듣고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갈라놓을 꾀를 내어, 항우가 사신을 보내오자 진평은 정중히 사신을 맞이하며 범증의 안부를 물었다. 사신이 “나는 초패왕 항우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요.” 라고 하자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면서 잘 차린 음식을 초라한 음식으로 바꾸게 한 뒤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범증은 크게 화가나,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뒷일은 대왕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원컨대(대왕께 바친 제 해골을 구걸하오니) 제 해골을 돌려주시어 졸오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天下事大定矣 君王自爲之 願賜骸骨歸卒伍)”라고 하였다.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이간계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등창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졸오 : 당시 호적에서 다섯 호를 ‘오(伍)’라 했고, 3백 호를 ‘졸(卒)’이라고 칭했다. 즉 이 말은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뜻이다.

홍문연(鴻門宴)은 항우가 홍문에서 연회를 열어 유방을 해치려 했으나 유방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홍문연은 겉보기엔 화려한 잔치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살의가 가득 차 겉과 속이 다른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며, 홍문지연, 홍문지회라고도 한다.

秦始皇(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황제가 되었는데, 호해는 정치는 환관 조고에게 맡기고 술과 여자만을 찾으니, 백성들은 더욱더 살기 어려워지고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옛 초나라 땅에서는 항우가 그의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였고, 그 보다 조금 늦게 沛(패)땅의 한미한 집안 출신 유방 역시 떨쳐 일어나 진나라 군과 싸웠다. 유방의 힘은 항우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나 장량의 지혜를 힘입어 항우보다 먼저 진나라의 도성인 咸陽(함양)에 먼저 진입했다. 이에 앞서 항우는 대의명분을 위해 초나라의 옛왕족을 찾아 회왕으로 옹립하였는데, 회왕은 함양에 먼저 들어간 자가 관중의 왕이 될것이라 하였었다.
유방이 이미 함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대노하여 40만 대군으로 유방을 치고자 했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항우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방은 장량과 번쾌 등 백 여명의 군사만 데리고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는 항우를 찾아가 자기를 臣이라 칭하면서 사죄하니 항우는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홍문지연이다. 항우의 책사 범증은 이 연회에서 자주 항우에게 눈짓을 하여 빨리 유방을 죽일것을 청하였으나 항우가 머뭇거리자, 장수 項莊(항장)을 시켜 칼춤을 추면서 기회를 보아 유방을 죽일것을 명하였다. 유방과 함께 왔던 장량은 낌새를 채고 장수 번쾌를 들여보내 호위하게 하였다. 잠시 후 유방은 측간에 가는 척하고 나와 뒷일을 장량에게 맡기고 그 길로 달아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