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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의 글 태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후생(後生)이 두려울 만하니 앞으로 오는 자(後生)들이 나의 지금보다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40∼50세가 되어도 알려짐이 없으면 그 또한 족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後生可畏니 焉知來者之不如今也리오 四十五十而無聞焉이면 斯亦不足畏也已니라)”

– 논어.자한.22장

에메랄드를 캐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보석 채굴꾼이 있었다. 그는 오 년 동안 강가에서 99만 9천9백99개의 돌을 깨뜨렸지만 결국 에메랄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한계에 다다랐고 마침내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순간 하나의 돌멩이가 그의 발 앞에 굴러떨어졌다. 오 년 동안의 보람 없는 노동에 한껏 화가 나 있던 채굴꾼은 그 돌을 집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가 던진 돌은 날아가 다른 돌과 세게 부딪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메랄드를 내보이며 깨어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단 하나의 돌을 깨뜨리면 에메랄드를 캘 수 있었는데, 이제 막 성공하려는 그 순간에 채굴꾼은 포기를 선택했다. 돌멩이가 그의 발 앞에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 에메랄드는 끝내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고사성어가 공휴일궤이다. 공휴일궤란 ‘아홉길 높이의 산을 쌓는 일이 한 삼태기 흙을 쌓아올리지 못해 실패하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헛된 일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구인공휴일궤(九仞功虧一簣)라고도 한다.
이 고사는 서경 여오편에서 보인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자, 서쪽의 오랑캐 나라에서 축하의 뜻으로 진기한 개 한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그 개는 키가 넉 자나 되는 큰 개로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었고 사냥을 잘해 무왕이 몹시 기뻐하며 소중히 여겼다. 그러자 무왕의 동생 ‘석(奭)’이 무왕이 진기한 물건에 마음이 이끌려 정치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말했다.
“임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하의 정치를 힘써 행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도 일을 다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不矜細行하시면 終累大德하야 爲山九仞에 功虧一簣하리이다)”

공유일궤라는 고사성어는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알고 포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을 다한 노력이 한발만 더 내딛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메랄드를 내어줄지, 아니면 여전히 돌멩이를 내어줄지는 모를일이다.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동안의 들인 공이 아깝더라도 과감히 포기해야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말을 알지 못하니, 선택이 쉽지는 않다. 그럴때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자체, 그 과정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선택이란 늘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일이겠지만 한 삼태기의 흙을 쌓아올리지 못하고 중도포기하는 어리석음과 실수만은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증자가 병이 위중하자,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였다.

“<이불을 걷고> 나의 발과 손을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전전(戰戰)하고 긍긍(兢兢)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하였으니, 이제서야 나는 <이 몸을 훼상시킬까 하는 근심에서> 면한 것을 알겠구나, 소자(小子-제자)들아!(啓予足하며 啓予手하라 詩云 戰戰兢兢하여 如臨深淵하며 如履薄氷이라하니 而今而後에야 吾知免夫로라 小子아)”

– 논어.태백.3장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공자)의 사람됨이 어떤 일에 빠져들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어 늙어가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女奚不曰 其爲人也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 논어.술이.18장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취하고 그녀를 숙비로 봉하여 패륜을 저지르니, 이에 우탁1)은 죽음을 각오하고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지부상소持斧上疏).
충선왕의 곁에 있던 신하는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했다. 그러자 우탁은 호통을 치며 “경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임금의 패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우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충선왕의 잘못을 극간(極諫, 끝까지 간함)했다.

“군왕은 날마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패륜이옵니다. (중략)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사옵니다.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충선왕은 개혁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징계하여 다스림)하지는 않았다.


1)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역학에 뛰어났다.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며, 지자는 낙천적(樂天的)이고 인자는 장수(長壽)한다.(知者는 樂水하고 仁者는 樂山이니 知者는 動하고 仁者는 靜하며 知者는 樂하고 仁者는 壽니라)”

– 논어.옹야.21장

고기를 잡으면 고기를 잡던 통발은 잊는다는 말로, 뜻을 이루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버리게 된다는 뜻.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만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도구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말이란 마음속에 가진 뜻을 상대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므로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버리고 만다.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말하고 싶구나.

– 장자.외물편

위의 글에서 통발, 올가미, 말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을 말하며, 따라서 득어망전의 본 의미는 진리에 도달하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버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