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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왕 연산군이 재위 10년(1054년) 1월 신하들에게 달도록 했다는 신언패(愼言牌)는 임금 앞에서 쓸데없이 입방아를 찧으면 경을 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경고문으로 당나라 때 풍도라는 사람이 쓴 ‘설시(舌詩)’를 베낀 것이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아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풍도(馮道, 882~954)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중국의 정치가이자 고급 관료이다.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요·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처세의 달인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취하고 그녀를 숙비로 봉하여 패륜을 저지르니, 이에 우탁1)은 죽음을 각오하고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지부상소持斧上疏).
충선왕의 곁에 있던 신하는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했다. 그러자 우탁은 호통을 치며 “경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임금의 패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우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충선왕의 잘못을 극간(極諫, 끝까지 간함)했다.

“군왕은 날마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패륜이옵니다. (중략)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사옵니다.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충선왕은 개혁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징계하여 다스림)하지는 않았다.


1)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역학에 뛰어났다.

선비의 기상이 꺾이고 언로가 막히면 곧은 선비가 기미를 살펴보고는 멀리 숨어버릴 것이며 말만 잘하는 자들이 그 틈을 타 앞 다투어 나올 것입니다.(士氣旣挫 言路旣塞 則直士色擧而遠遯 佞人伺隙而競進)

– 율곡이이 상소 중에서《율곡전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富)를 만일 구해서 될 수 있다면, 내 말채찍을 잡는 자의 짓이라도 내 또한 그것을 하겠다. 그러나 만일 구하여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富而可求也인댄 雖執鞭之士라도 吾亦爲之어니와 如不可求인댄 從吾所好하리라)”

– 논어.술이.11장

공자께서 안연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써주면 도(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用之則行하고 舍之則藏을 惟我與爾有是夫인저)”

자로가 말하였다.

“부자(夫子)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子行三軍이면 則誰與시리잇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하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를 데리고 할 것이다.(暴虎馮河하여 死而無悔者를 吾不與也니 必也臨事而懼하며 好謀而成者也니라)”

– 논어.술이.10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보였을 때 이것으로 남은 세 귀퉁이를 유추하여 반증(反證)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는다.(不憤이어든 不啓하며 不悱어든 不發호되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也니라)”

– 논어.술이.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