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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의 글 태그

물 속에 몸을 숨긴 용은 함부로 쓰지 않는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단련(鍛鍊)해 힘을 모으고 때를 기다려야 하며,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면 성급(性急)하게 행동해서는 안됨.
잠룡潛龍은 용龍의 덕성을 지니면서도 숨어 있는 자이다. 잠룡은 세상을 바꾸려고 하거나 세상에 따라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숨어 있으나 의지가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 그가 바로 잠룡潛龍이다.

맹자가 말하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발단이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발단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발단이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발단이니, 이 네 가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것을 넓혀 확충할 수 있다면 족히 사해(四海)를 보존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다면 부모도 족히 섬길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맹자.공손추장구상.6장

‘惻’은 간절히 슬퍼함.
‘隱’은 깊이 아파함.
‘羞’는 자신이 선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함.
‘惡’는 남이 선하지 못한 것을 미워함.
‘辭’는 풀어서 자기로부터 떠나게 함.
‘讓’은 밀어서 남에게 줌.
‘是’는 선(善)함을 알아 옳다고 여김.
‘非’는 악(惡)함을 알아 그르다고 여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군주만의 약점, 또는 노여움 자체를 가리키는 말.

夫龍之爲蟲也, 可擾狎而騎也. 然其喉下有逆鱗徑尺, 人有嬰之, 則必殺人. 人主亦有逆鱗, 說之者能無嬰人主之逆鱗, 則幾矣.
용이라는 벌레는 잘 길들여 가지고 놀거나 그 등에 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덜미 아래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는데, 그것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임금에게도 역시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임금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한 유세에 가깝다.

– 한비자.세난편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세 형제 중 막내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맏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달아나 버렸다. 숙제 역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났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중간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문왕(文王) 서백창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의탁(依託)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죽었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선왕의 시호(諡號)를 문왕(文王)이라고 일컫고 동쪽으로 주왕(紂王)을 치려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로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여상)이 그들을 두둔하여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일으켜서 가게 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의롭게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를 뜯어 먹다 마침내 굶어 죽었다. – 사기열전.백이열전
– 저자 사마천.역자 김원중.민음사 .2015.06.10

해석하면 ‘자라도록 돕는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될 것 같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더 심해지도록 부추기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이야기는 맹자집주 공손추와 맹자와의 대화에서 보인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해서 묻자,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의(義)를 나날이 쌓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억지로 무리하게 구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송나라 사람의 예를 들어 말하길,

“송나라에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해 그 싹을 뽑고는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에게 말하길 ‘오늘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 아들이 달려가 살펴보니 싹들이 모두 말라 죽어 있었으니, 호연지기를 억지로 무리하게 구하는 것은 마치 싹을 조장하는 것과 같아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까지 끼치게 된다.”

하였다.
– 맹자.공손추장구상.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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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성취(成就)하려는 마음 때문에 고전(古典)을 읽을 겨를이 없고, 지금(只今) 읽는 글 또한 정밀(精密)하게 이해(理解)할 틈이 없으니, 몸에 무르익도록 할 시간(時間)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 생각은 두서(頭緖)없이 매양 무엇엔가 쫓기는 듯하여, 처음에는 여러 책(冊)을 널리 읽고자 한 것이었지만, 점점 황망(慌忙)하여 갈래를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結局)에 가선 처음부터 아무것도 읽어보지 않는 사람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꼴이 되어버린다.

– 자성록.이황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는 맹자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왕도(王道)는 맹자가 추구한 이상적인 정치형태로서, 덕으로 다스리는 덕치(德治)라고도 할 수 있고, 맹자가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덕은 백성을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인(仁)이라는 점에서 인정(仁政)이라고도 표현된다. 패도는 천자(天子)의 힘이 쇠미(衰微)해진 춘추시대 이후부터, 패자와 힘이 있는 제후(諸侯)가 실력주의로 제후를 거느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말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무력이나 권모술수(權謀術數)로써 나라를 다스리거나 공리(功利)만을 꾀하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1. (길이) 돌아서 멀다.

그곳에 갈 때는 일부러 우원한 길을 선택했다.

2. 방법(方法), 태도(態度), 생활(生活) 따위가 현실(現實)과 거리(距離)가 멀다.

그러한 정책(政策)은 국민(國民)들의 현실(現實)과는 우원한 것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 대해 고려 왕조를 모방하여 공(公)을 칭하였으나,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다는 이유로 1401년(태종 1년) 음력 1월 25일 공(公)이라는 호칭은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고쳐졌다. 함께 쓰이던 후(侯)·백(伯)의 호칭은 각각 부원군(府院君)과 군(君)으로 고쳐졌다. 이후 부원대군은 폐지되고 대군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다만 이 당시만 해도 환조(桓祖)의 서자인 이화가 대군에 봉해진 것으로 볼 때 체계적으로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왕비 소생의 아들에게만 대군의 작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상 1414년(태종 14년) 음력 1월부터였다. 이때서야 왕비 소생의 왕자에게 “대군(大君)”을, 빈(嬪,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군(君)”을 봉하기 시작했다. –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