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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 열중하여 밥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깊이 빠져 들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초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로가 초나라 변방 섭현의 태수 섭공에게 스승인 공자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자로’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공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로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공자)의 사람 됨됨이는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들면 밥 먹는 것 조차 잊고 즐거워하며 모든 근심 걱정도 잊고 나이를 먹어 늙어가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이후로 자로는 평생을 두고 ‘發憤忘食(발분망식)’ 이란 네 글자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논어.술이편

옛 형벌 기구인 차꼬와 수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차꼬는 기다란 두 개의 토막나무 틈에 가로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그 구멍에 넣고 자물쇠로 채우게 되어 있는 형벌 기구이다. 즉 桎梏(질곡) 이라는 말은 속박(束縛) 또는 굴레라는 말과 비슷하다.

예문)
桎梏의 세월을 보내다.
독재의 桎梏에서 벗어나다.
그들은 인습의 桎梏에서 벗어났다.

송宋나라의 태조(조광윤)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보(趙普)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터에 나가느라 학문에 밝지 않음을 염려하여 퇴근한 뒤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태조가 죽고 그의 동생 태종(조광의)이 즉위한 뒤에 재상이 되자, 여러 사람들이 조보의 학식 없음을 말하며 시기하였다. 태종이 이에 대해 조보에게 묻자, 그는 변명하거나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솔직히 대답하였다.

“신이 평생 아는 것이 진실로 이 말(논어)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그 책의 절반으로 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고, 지금은 그 절반으로 폐하를 도와 태평성대에 이르게 하고자 합니다. (臣平生所知 誠不出此 昔以其半輔太祖定天下 今欲以其半輔陛下致太平).”

조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책 상자에서 나온 단 한 권의 책이 논어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서 ‘반부논어(半部論語)’ 또는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 나대경.학림옥로

白犬前行黃犬隨
野田草際塚纍纍
老翁祭罷田間道
日暮醉歸扶小兒
흰둥이는 앞서고 누렁이는 따라가는데,
들 밭가의 풀숲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다.
늙은이는 제사를 끝내고 밭 사이 길에서
해 저물 녘 아이의 부축 받고 취해 돌아온다.

~을 (비유적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리다.

 

현실을 호도(糊塗)하다.

사건의 본질을 호도(糊塗)하다.

그들의 비리에 대하여 알레르기성 반응을 표출시키는 저변엔 내 무능을 호도(糊塗)해 보자는 비열한 잔꾀가 은닉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출처 : 김성동, 만다라

내게 나무를 자를 여덟 時間이 있다면 나는 도끼를 가는데 여섯 시간을 쓸 것이다.
If I had eight hours to chop down a tree, I’d spend six hours sharpening my ax.

– 에이브러햄 링컨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맹자는 먼저 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와 칼이 차이가 있냐고 묻는다. 양혜왕이 차이가 없다고 대답을 하자, 그러면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차이가 있냐고 다시 물으니, 역시 차이가 없다고 대답을 한다. 이어 맹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 맹자.양혜왕장구상.004.

“(왕의) 푸줏간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으면서,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입니다.”

맹자의 이 말은 임금이 정치를 하면서 실제 짐승을 몰아 백성을 죽이는 일이야 없겠지만, 一身의 욕심만을 좇아 자신의 푸줏간에 고기를 가득 채워두는 등 재산을 불리면서 백성들이 궁핍함을 돌보지 않는다면 짐승을 몰아 백성을 죽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맹자가 처음 양혜왕에게 했던 질문처럼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몽둥이와 칼로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라는 뜻으로, 불경에서 부처의 공덕을 찬탄(讚歎/贊嘆)하거나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일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놀라운 사건이나 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 ‘미증유의 참사’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미상유(未嘗有)라고도 하며, 전대미문(前代未聞: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음)과 같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