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공자)의 사람됨이 어떤 일에 빠져들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어 늙어가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女奚不曰 其爲人也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 논어.술이.18장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공자)의 사람됨이 어떤 일에 빠져들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어 늙어가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女奚不曰 其爲人也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 논어.술이.18장
공자께서 평소 늘 말씀하시는 것은 《시(詩)》와 《서(書)》와 예(禮)를 지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평소에 늘 하시는 말씀이셨다.(子所雅言은 詩書執禮니 皆雅言也러시다)
– 논어.술이.17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加『[假]』我數年하여 五十『[卒]』以學易이면 可以無大過矣리라)”
– 논어.술이.16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의(義)롭지 못하고서 부(富)하고 또 귀(貴)함은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으니라.(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矣니 不義而富且貴는 於我如浮雲이니라)”
– 논어.술이.15장
염유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위(衛)나라 군주를 도우실까?(夫子爲衛君乎아)”
라고 하자, 자공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내 장차 여쭈어보리다.(諾다 吾將問之호리라)”
하였다. 들어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伯夷叔齊는 何人也잇고)”
하고 묻자, 공자께서는
“옛날의 현인(賢人)이시다.(古之賢人也니라)”
하고 대답하셨다.
“<백이와 숙제는>후회하였습니까?(怨乎잇가)”
하고 묻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後悔)하였겠는가.(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라고 대답하셨다. 자공이 나와서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는 그를 돕지 않으실 것이다.(夫子不爲也시리라)”
하였다. – 논어.술이.14장
공자께서 제(齊)나라에 계실 적에 소악(韶樂)을 들으시고, <배우는>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시며
“음악을 만든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不圖爲樂之至於斯也호라)”
하셨다. – 논어.술이.13장
연산12년 5월 24일
조선 10대왕 연산군이 재위 10년(1054년) 1월 신하들에게 달도록 했다는 신언패(愼言牌)는 임금 앞에서 쓸데없이 입방아를 찧으면 경을 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경고문으로 당나라 때 풍도라는 사람이 쓴 ‘설시(舌詩)’를 베낀 것이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아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풍도(馮道, 882~954)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중국의 정치가이자 고급 관료이다.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요·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처세의 달인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취하고 그녀를 숙비로 봉하여 패륜을 저지르니, 이에 우탁1)은 죽음을 각오하고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지부상소持斧上疏).
충선왕의 곁에 있던 신하는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했다. 그러자 우탁은 호통을 치며 “경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임금의 패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우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충선왕의 잘못을 극간(極諫, 끝까지 간함)했다.
“군왕은 날마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패륜이옵니다. (중략)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사옵니다.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충선왕은 개혁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징계하여 다스림)하지는 않았다.
1)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역학에 뛰어났다.
“언로가 열렸느냐 막혔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다.(言路開塞 興亡所係)”
– 율곡이이